한나절 다녀본 통영

취향의 흔적
- 여행, 2016-02-03, resistan

10년도 더 전에 우포늪 가다 잠시 들렀던 곳. 최근 뜨는 여행지라며 곧잘 소개되는 곳. 그래서 언젠가 제대로 한 번 봐야지 했던 곳.

조금은 뜻밖의 계기로 다녀오게 됐다. 금요일 퇴근 후 고속버스를 타기로 하고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기왕 간 김에 짧게라도 통영을 좀 둘러볼까 싶어 모노포드도 함께.

부고

목요일 저녁 갑자기 날아든 동창의 부친상 소식. 꽤 먼 거리라 좀 망설여졌지만, 결혼한 친구들은 아마 더 맘먹기 힘들겠거니 하는 생각에 내려가기로 했다. 자정께 도착해서 조문하고는 장례식장에서 멀지 않은 부둣가의 모텔을 숙소로 삼았다. 기왕 왔으니 다음 날 아침의 발인식에도 참석. 고등학교 졸업하고 처음 만난 S양은 어느새 씩씩하게 자란 아들과 함께 왔다.

낯설지만 반가운

어린 시절 집 앞 골목을 나가면 3분쯤 거리에 화물 부두가 있었다. 창고 건물이 늘어선 부둣가와 비어있는 바지선이 우리들의 놀이터가 되고는 했다. 어선이 들어오는 곳은 조금 더 나가야 했고, 그나마 자갈치 쪽에 하역을 끝낸 빈 배가 주로 서는 곳이었다.

그래서 통영의 아침은 내겐 낯설고도 반가운 풍경이었다.

통영 동호항의 아침

산책 삼아 숙소 근처의 작은 부두로 향했더니, 생선을 기대하는 갈매기가 철새떼처럼 하늘을 메우고 있다.

전날 저녁에 비가 잠시 왔다. 여전히 흐린 하늘이 조금 아쉬운 아침 8시. 도시에서는 출근하는 사람들로 한참 북적일 텐데, 어촌은 이미 분주할 시간이 지났다. 정박 중인 배에는 갑판을 정리하는 분이 몇 분 보일 뿐, 항구는 이미 한산했다.

출하를 기다리는 생선들.

비닐의 색깔이 행선지를 표시하는 거겠지.

모퉁이에 자리 잡은 수협 건물 1층은 공판장인 것 같았다. 여기도 새벽에 들어온 생선을 정리하는 아주머니 두 분만이 분주했다. 버려지는 생선이라도 기다리는지 그 건물 옥상에는 갈매기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빈속을 해결하자며 주변을 좀 돌아봤다. 처음 찾아 들어간 곳에는 아침인데도 장어탕과 매운탕 종류만 있어서 그냥 나올 수밖에 없었다.

새벽 일이 끝난 어부들은 아마 집으로 가겠지. 뜨내기들이 아침부터 갈만한 식당을 항구에서 찾기는 쉽지가 않다.

편의점에서 대충 끼니를 때울까 하다가 두 번째 찾은 식당은 돼지국밥집. 부산에서도 돼지국밥집은 여러 곳 다녀본 입장인지라, 훌륭하다는 말까지는 나오지 않아도 적당히 괜찮았다. 신기하게도 이날 먹은 식당 음식은 모두 조미료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함께 간 친구도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통영에서는 조미료를 많이 안 쓰는지도.

동피랑, 서피랑

'피랑'은 높은 벼랑의 사투리라고 한다. 지도에 동그라미로 지역을 두 곳 표시했는데 오른쪽이 동피랑 마을, 왼쪽이 서피랑 마을이다. 가보면 꽤 가파른 언덕 위로 마을이 들어서 있다.

동피랑 마을은 벽화 마을로 유명하다. 통영시는 벽화 마을을 관광객 유치 컨셉으로 잡았는지 시내 곳곳에서 아기자기하게 색칠된 건물을 볼 수 있었다. 벽화를 보다 보니 이화동과 비교하게 됐는데 동피랑 마을에선 상대적으로 일관성을 조금 찾기 어려웠달까. 다만 바다를 면한 곳이라 그런지, 세월호에 남기는 말로 가득한 벽이 있었던 게 인상적이었다.

지도를 보며 주변의 명소들을 조금 더 찾아보기로 했다. 찾아보니 통영에는 조선 수군이나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유적지가 많다.

삼도수군통제영을 복원해 놓았는가 하면, 이순신 장군만을 모신 충렬사가 있다. (부산 충렬사는 송상현 장군부터 왜란에서 공을 세운 여러 장수가 모셔져 있다.) 사적지라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는데, 안타깝게도 사당 본전이 공사 중이었다. 건물은 본전 아래로 좌우에 몇 동이 있고, 유물 전시관이 작게 마련돼있다. 목련, 동백나무가 진입로에 심겨 있는데, 꽃봉오리는 아직 추운 날씨에 웅크리고 있었다. 수백 년 이상을 살아온 보호수 몇 그루도 뜰에 자리하고 있다.

여객터미널과 서호시장 주변에 맛집이 있다고 해서, 점심을 해결할 겸 여객부두 쪽으로 향했다. 인터넷으로 검색할 때는 잘 몰랐는데, 서피랑 마을도 있었다. 안내판을 보고서야 알게 됐지만 서피랑 마을에는 소설가 박경리의 생가가 있다. 계속 도보로 이동 중이라, 다리를 좀 쉬고 싶어 올라가 보진 않았다.

점심은 친구의 추천을 받아 미주뚝배기라는 곳에서 해결했다. 맛집으로 소문난 곳인 듯, 2층에 있는 가게를 올라가는 계단에는 단호한 경고문이 몇 개 붙어 있었다. 메뉴는 해물 뚝배기 하나뿐이라던지, 2인분 이상만 주문이 된다든지.... 덜덜덜. 내 입이 좀 싸구려라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그리 저렴한 메뉴는 아니다. 1인분에 1만 1천원, 가성비는 괜찮은 것 같다. 역시 조미료 맛을 찾을 수 없었다.

한산도

원래 계획에는 미륵산 정상에서 한려수도 전망을 보는 일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케이블카가 작년의 정지 사고로 정비 중이라고 한다. 어쨌든 다도해에 왔으니 섬을 보고 가야지. 유람선을 탈까 하다가, 배 위의 시간이 너무 긴 듯해서 당일로 다녀올 수 있는 곳에 가보기로 했다.

통영 여객터미널에서 한산도까지는 배로 20분. 터미널의 관광 안내소에서 시간 내에 볼만한 곳을 추천해주셨다.

한산도 마을버스

한산도 쪽 선착장은 이순신 장군 유적이 있는 제승당이다. 이순신 함대의 사령부가 있던 곳이라는데 충렬사를 다녀왔으니 우선 추봉도로 향했다.

섬의 마을버스

섬을 도는 마을버스는 서울 교통 카드로도 탑승할 수 있다. 배 들어오는 시간에 맞춰 배차되는지, 버스에 오르니 같은 배를 타고 온 사람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한 가지 재밌는 광경이라면, 이 마을버스가 섬 주민들의 자체 택배편이랄까. 통로에 잔뜩 쌓인 짐은 배와 버스 편을 이용해 배달되고 있었다. 뒷문 앞에 앉았던 아저씨는 버스가 정류장에 서면 짐 내리는 걸 도와주곤 하셨다. 도서 산간 지역의 택배비가 비싼 이유에 고개가 끄덕여지면서도, 시골 인심이 좋구나 싶어 어쩐지 안심이 된다.

봉암 몽돌 해수욕장

관광 안내소에서는 몽돌 해수욕장 쪽 해안 도로 조성이 잘 되어있다고 했다. 안내 전단에 나와 있던 포로수용소 터까지 가볼 생각이었는데, 조성이 돼 있다는 도로 구간이 예상보다 짧아서, 해변과 마을 주변을 좀 돌아보고 나왔다.

함께 갔던 친구가 알려줘서 깨닫게 된 사실 하나는.... 해안가 길로 접어든 후부터는 사람 소리, 차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낚시꾼도 보이고, 앞바다에 떠 있는 김 양식장과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 해변 자갈밭에도 분명히 사람의 모습이 있건만 작은 배 한 척 지나가지 않는 풍경 속에는 자연의 소리만 남아 있었다.

추봉리 골목

시금치를 다듬는 추봉도 사람들.
골목에 예쁘게 놓인 벤치가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

작은 마을을 끼고 있는 몽돌 해수욕장은 자갈이 깔린 해변이다. 해변의 자갈을 몽돌이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집어가는 사람이 많은지 몽돌을 가져가지 말아 달라는 당부가 적힌 현수막이 있었다. 한산도가 뭍과 워낙 가깝기도 하고, 카페리가 다니는 곳이다 보니 한산도와 다리로 이어진 추봉도에도 도로가 잘 닦여 펜션과 민박집 간판이 눈에 띈다.

이순신 장군이 달 밝은 밤 큰 칼 옆에 차고 시름 했다는 수루를 한 번쯤 보고 싶긴 했지만, 제승당 구경은 포기하기로 했다. 밥 먹고, 배 타고, 버스 탄 시간을 빼면 종일 걸어 다닌 셈이라 꽤 피곤하기도 했고. 제승당이 선착장에서 멀지는 않지만 마을버스가 선착장에 도착하는 시간이 배 출발 시각에 맞춰져 있어 아쉽지만 한산도를 뒤로 했다.

시락국

서울행 버스표를 예매해 두고, 추천받은 시락국 집을 찾아 서호시장으로 갔다. 시락국은 시래깃국의 경상도 사투리다. 나도 자주 먹던 음식이라 시래기를 넣은 된장국 정도로 알고 있었다.

서호시장의 원조시락국에도 메뉴는 시락국 하나 뿐이다. 이 집의 시락국은 장어를 뼈 채 고아 육수를 만들고, 거기에 시래기를 넣어 만드는 거란다. 그래서 그런지, 먹어보면 마치 추어탕 같다. 오뎅바처럼 둘러앉도록 만들어진 식탁에는 재피(산초) 가루도 있다. 반찬과 토핑 재료는 바의 가운데 뷔페처럼 놓여 있어서 먹고 싶은 만큼 덜어 먹으면 된다.

처음 나오는 국물은 조금 싱겁게 느껴지는데, 젓갈이나 간장 등의 양념이 준비되어 있으니 취향대로 간을 할 수 있다. 새벽 4시 반부터 오후 6시까지 한다는 식당은 어머니가 시작해서 아들이 대를 이어 하고 있다. 푸짐함보다는 소박하지만 든든한 한 끼를 비교적 저렴하게 해결할 수 있는 곳이다.

다시 갈 일이 생기겠지

쓰다 보니 글이 길다. 그러고 보면 나도 일이든 MT든 여러 이유로 다녀본 곳이 꽤 많다. 크, 내가 참 팍팍하게 살았나 보다. 작년부터는 짧게라도 여행을 다니다보니, 눈에 들어오는 것도 달라지고 있다.

동피랑, 서피랑 마을을 포함해서 여객터미널 주변의 시내 중심부만 둘러 보기에도 한나절이 부족한 감이 있다. 새벽에 돌아오더라도 달아 해안의 일몰을 보고 올 걸 그랬나 하는 아쉬움도 생기고.

통영. 언젠가 다시 가볼 수 있겠지.

덧.

며칠에 나눠서 글을 쓰는데, 서버가 죽는 장면을 2번이나 목격했다. 아무리 저렴한 웹 호스팅이라지만 다른 사람의 트래픽 오버에 함께 희생당하는 게 익숙해질 리 없다. 블로그 옮기면서 그냥 다른 사람 따라 미리내로 왔는데, 덕분에 사이트가 죽는 상황을 정말 오랜만에 겪는다. 서울 리전이 생겼다는 AWS EC2라도 써야 하나 고민이 된다. 혹시 워드프레스 블로그를 프리티어 이후에 운영할 경우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아신다면, 알려주시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