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듀트님의 생일연을 빙자한 술자리가 있어서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과 함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들만의 리그', '웹 표준 상위 그룹' 운운하는 이야기가 나와 잘 써지지 않는 연재물은 일단 제쳐두고 몇 자 써보려고 한다.
사실 이런 글을 쓰는 것이 꽤 민망하다. 웹 표준이나 웹 접근성이나 이미 많은 전문가들이 계신 상태고, 내 일천한 경험을 늘어놓는 것 같아 괜히 조심스러워진다.
한국 웹 표준의 역사 운운하는 건 좀 그렇고
역사의 산 증인이니 어쩌니 할 주제도 못되고 그냥 다들 아는 이야기로 시작을 해보자면, 국내에 웹 표준이 그나마 알려지고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2004~2005년 경이었다. 나 역시 2005년에 웹 표준을 시작했으니까 조금 일찍 줏어들은 셈이다. 내가 처음 웹 표준에 대해 제대로 알기위해 시도했던 것은 윤석찬님, 신현석님, 장지윤님, 이성노님 같은 분들이 준비했던 CSS를 이용한 웹 사이트 디자인 전략 세미나1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세미나에 참석해서 새로운 걸 배우니 확실히 혼자 들이받는 것 보다는 훨씬 좋았다. 웹 표준을 설득할 근거도 알 수 있었고. 한마디로 말해서 나는 그 날 웹 표준에 매료됐다.
그 해까지만 해도 사실상 국내에서 웹 표준을 제대로 한다는 사람들은 손에 꼽을만 했다. 나 역시 생초보였고, 닥치는대로 만들어보면서 이해도를 높여가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웹 2.0 열풍과 함께 웹의 전반에 대해서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 이런 저런 세미나나 자리에 자주 얼굴을 내밀게 됐다. 시운이 좋았는지 웹 표준을 공부하면서, 웹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여전히 부족하지만) 내가 가진 지식이 조금씩 늘어갔다.
기억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내 경우엔 제 1회 웹 표준의 날(당시에는 '제 1회 CSS Design Korea 정식 모임'이라는 명칭을 썼지만)에 자원 봉사를 신청해서 참여했었다. 할 줄 아는 건 없지만 뭐라도 하고 싶었고, 어찌됐던 웹 표준을 잘한다는 사람들에게 한 자라도 더 물어보려면 좀 친해질 필요도 있지 않았겠는가. 그게 인연이 된 건진 몰라도 아직도 웹 표준의 날엔 자원 봉사를 하고 있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런 활동이 내가 웹 표준을 하면서 회사 생활을 하는데 힘을 주기도 했다. (이런 자리을 통해서 만났던 분들을 나중에는 내가 있는 회사로 모시기도 했었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일
2006년 하반기의 BarCampSeoul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참석하고 보니 신현석님도 같은 컨퍼런스에 왔었는데 그 날 웹 표준 관련 강의를 제안해주셨다. 현석님과는 몇 번 뵙지도 않았는데, 그런 제안을 해주신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솔직히 내 실력이 의심스러웠고, 회사에서 하루 빠질 수 있을지 걱정도 됐고(회사에서 허락을 받았으니 하게 된거지만), 정말 오만가지 생각으로 머리 속이 복잡했었다.
어쨌거나 있는 것 없는 것 다 꺼내서 강의를 하려고 준비해서 처음 강의하러 갔던 날은 (수강생들 외에는 아는 사람도 없겠지만) 얼마나 떨었는지 모른다. 지금은 사람들 앞에 서는 일에 좀 익숙해져서 실수를 해도 대충 얼버무릴 뻔뻔함이 생겼지만, 그 때는 잘못하면 큰일난다 생각했었으니까. 지금 와서 말하는 거지만, 처음(2006년)에 비해서 최근의 강의 자료는 (어떤 면에선 조금 퇴보한 느낌도 있지만) 훨씬 질이나 양적인 면에서 정확하고 풍부해진 편이다. 그 시절 많이 모자라고 버벅대는 강의를 들어주셨던 많은 분들께 이 글을 빌어 진심으로 사죄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다른 사람 앞에 선다는 것은 일단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한 준비가 필요한 것이고, 그만큼의 공부가 더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내가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서 준비해야 하는 내용이 훨씬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많을 수밖에 없을테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남들보다 좀 더 일찍 많은 공부를 할 필요가 있었다. 잘 알기 때문에 남들을 가르치는 입장이 아니라, 남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공부했고 그래서 지금은 공부했던 만큼의 시간은 벌었다고 생각한다.
커뮤니티의 확산
전쟁의 폐허는 처참하기 그지없겠지만, 기술의 급진적 진보는 대개 전쟁을 통해 이루어지곤 한다. 한국에서 웹 표준을 하네 마네 한바탕 홍역을 치르고 났더니 어느샌가 웹 표준을 하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늘었다.
과거에는 웹 표준을 논의할만한 공간이 CSS Design Korea(이하 CDK)나 한국 모질라 사이트의 웹 표준 포럼 정도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웹 표준을 인식하고, 공부하고, 사용하게 되면서 논의의 공간도 늘고 참여 인원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지금은 웹 표준 커뮤니티 하면 빠지지 않는 곳이지만 네이버 카페 하드코딩하는 사람들(이하 하코사)의 성장은 괄목할만하다. 내가 이 카페에 가입했을 때는 전체 회원 수가 100명 남짓이었는데 지금은 어느새 1만 6천명을 훌쩍 넘기고 있다. 최근엔 하코사의 글을 가끔 들여다보면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다. 카페의 특성상 질문과 답변이 전체 게시물 중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 답변 중에는 정말 깊이 있는 내용이 있기도 하고, 좋은 아이디어들이 보이기도 한다. 또 수십에 달하는 스터디 모임을 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웹 표준을 공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예의 하코사의 스터디로 시작해서 독립적인 모임이 된 클리어보스의 경우에도 오페라 웹 표준 커리큘럼을 번역하는 일부터, 신입 퍼블리셔를 위한 오리엔테이션이나 각종 웹 표준 세미나 등을 주최하는 등 다각적인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활동들은 웹 표준의 저변이 얼마나 넓어졌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겠다.
은거 고수는 무림이 위험할 때만 등장하는가
이런 저런 커뮤니티를 보고 있자면, 이제는 웹 표준 잘 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아졌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최근에 참여하기 시작한 스터디 첫 모임에 나가서, 또 은거 웹 표준 고수의 존재를 알게 됐는데, 외부에 나오기를 꺼려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혼자서 열심히 일하고 공부해 실력을 쌓은 사람도 확실히 많아졌으리라. 하지만 모든 실력자들이 외부활 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무슨 세미나다 컨퍼런스다 해서 내용을 살펴보면 예전부터 발표해왔던 사람들 아니면, 현재 대기업이라 부를만한 곳에 다니는 사람들이 발표를 하고 있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최근 들어 세미나 등에서 발표하는 분들을 향한 질투 섞인 시선을 발견하곤 한다. 그런 자리에서 발표하는 사람들이 늘 최고의 실력자들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 서는 건 아니다. 물론 뛰어난 분들도 발표를 많이 하시지만 조금 다른 경험, 혹은 하소연하고 싶은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용기가 있는 분들 역시 그런 곳에 서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또 그런 곳에 서시는 분들 중 일부는 알만한 사람들 다 아는 이야기를 또 하기 위해서 가야만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저변이 넓어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그 '아는 사람 다 아는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 역시 존재한다. 기존의 발표자들 역시 좀 피곤하지 않을까. 그 자리를 대신해줄 누군가는 항상 필요했다.
밥상머리에서
배우 황정민도 아닌데 왜 하필 밥상 이야기를 할까. 과거에 내가 썼던 글2에서 밥과 반찬 하는 법, 국끓이는 법을 HTML, CSS, Javascript 이해에 비유한 적이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웹 표준이나 그에 관련된 전반(속칭 이 바닥)을 밥상에 한번 대어보고 싶었다.
과거에 비해 현재의 웹 표준은 그 사용 정도나 필요성이나 정말 주류로 인정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말 그대로 밥상은 나름 거하게 차려져 있는 셈이다. 많은 사람들이 맛깔난 반찬도 올려뒀고, 여러분이 지은 밥도 올라와있다. 조금 일찍 온 사람들은 이미 단란하게 식사하는 중인가보다. 도시락 싸온 사람들 줄도 길다.
밥상이 충분히 큰데 몇 사람 앉아있다고 머쓱하게 기다리거나 주변을 배회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수저만 가져가서 슬쩍 끼어앉아도 뭐랄 사람도 없거니와, 큰 밥상에 자리도 많다. 먼저 온 사람들끼리만 먹는다고 투덜댈 이유가 어디있는가. 내 숟가락 챙길 정신과 낯선 사람들에게 말 걸 수 있는 용기면 충분하다. 남의 집 반찬 맛도 좀 보고, 맛있으면 만드는 법도 좀 물어보고, 함께 앉아 밥 한 술 뜨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라도 나눠보시는 건 어떤가.
맛난 밥과 반찬, 국물은 그냥 함께 즐기면 된다. 이 밥상에서 중요한 건 한가지 뿐이다. 뭐라도 하나 만드는 법을 누군가에게 배웠다면, 나중에 나도 누군가에게는 그걸 가르쳐줘야겠다는 생각만 잊지 않으면 된다.
나오며
시장에서도 웹 표준은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모바일이니 뭐니하면서 기술의 저변은 더더욱 넓어졌지만 소통의 저변은 그대로인 것은 아닐까. 공유와 개방의 기치는 Web 2.0으로 떠들썩했던 시기부터 논의돼왔는데, 우리에게 과연 공유와 개방에 걸맞는 자세가 갖춰져있었던 것일까. 앞서 있었던 사람들의 등을 보면서 함께 가자고 말을 걸어볼만한 용기가 우리에게 부족했던 것은 아닐까.
늘 편하고 좋은 얼굴로 모든 일을 해나갈 수는 없겠지만, 노력하고 이해하려는 태도만 있다면 어지간한 일은 수월하게 풀리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 쓴 글...인데 결국은 또 개똥같은 밥상 이론으로 횡설수설 마무리한다.
KWAG의 열두번째 워크샵 신청을 오늘 오전 10시부터 받는다고 하니 신청하실 분들은 빨리 움직이시는 게 좋을 듯.
- 국내에서 최초로 열린 웹 표준 세미나이다. 내가 여기에 참석할 수 있었던 건 정말 행운에 가깝다. ↩
- 한 1년 반쯤 전에 웹 에이전시에서 웹 표준하기란 글을 썼었다. 회사에서 웹 표준하며 살아남기 위해 했던 일에 관한 기록을 긴 듯 짧게 정리했던 글이었고, 밥 한 숟갈 얻어먹기 보다는 밥 짓는 법을 배우란 얘기를 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