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로 간다

취향의 흔적
- 여행, 2016-10-15, resistan

꽤 오래전에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을 선물 받았다. 읽고 나서 내 스타일 아니라며 다시 다른 사람에게 선물했다. 이제는 안다. 당시의 내가 뭘 몰랐음을, 서툰 생각으로 쉽게 단정하며 살았음을.

낯선 곳을 딛고 서는 짤막한 날들이 쌓이면서, 난생처음 겪는 순간에도 그리 놀라지 않는 자신을 보면서, 여행의 이유를 조금씩 깨닫고 있는 것 같다.

오로라가 보고 싶었다

원래 가려고 마음먹었던 곳은 아이슬란드. 어딘가 써두진 않았지만 내게 위시리스트나 버킷리스트가 있다면 오로라를 보는 게 거기에 꼭 들어갈 거로 생각했다. 작년에 사진 동호회의 어느 분이 옐로나이프에서 찍어온 오로라 사진을 공유해주신 걸 보다 보니 그 끌림이 더 강해졌다. 연초에 방영한 꽃보다 청춘에서도 아이슬란드를 다녀왔고, 그걸 보다 보니 이번에는 가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성격이 성격인지라.... 마음을 먹고 나면 정보 수집에 들어간다. 여행 일정, 교통편 등등을 조사하다 보니 현실적으로 5~6일 정도 코스가 가장 무난해 보였다. 비행편과 함께 렌터카를 쉐어할 사람들도 찾기 시작했다.

쿠바 앙꼰 비치의 일출 무렵. 바다와 하늘 경계에 색상이 점차 번지고 있다.

앙꼰 비치의 일출 무렵. 꼭 오로라가 아니면 어떤가.

역시 Active X

정보를 열심히 찾아 읽고, 항공편 가격 추이도 보다가 적당히 싼 가격의 항공권을 발견했다. 중국 항공사라 좀 찜찜하긴 했지만, 저렴한 가격에 어찌 손을 놓을까. 노트북에서 결제하려고 하니 BC카드는 Active X가 필요하다고. 불안한 마음으로 데스크탑을 켜고, 같은 항공권을 사러 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금융감독원은 정말 도움이 안 된다.

지금 가야 할 곳

이후로 며칠은 망연자실 항공권 가격 추이만 살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좀 뒤틀린 마음이 들었달까. 여행을 준비하면서 이리저리 재는 게 썩 어울리는 모양새는 아니지만 꼭 아이슬란드가 아니라도 된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면서, 지인들에게 여행지 추천을 받아봤다.

의외로 다양한 의견이 나왔지만 결국 쿠바.

쿠바를 다녀온 사람들이 하는 말은 대개 비슷했다. 갈 거면 당장 가라고. 관광객에게 개방된 이후에 계속 변하고 있다고. 이미 많이 변했다고.

대체 뭐가 바뀐 것일까.

항공권은 샀지만

준비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사실 항공편 예산부터 계획을 한참 벗어났다. 아이슬란드행을 접은 것에 대한 반발 심리였는지.... 대체 무슨 마음이 들어 그리 싸지도 않은 항공권을 덜컥 사버렸는지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하는것인지.

다시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 컴퓨터 앞에서 일하는 직업이 이럴 때는 좋다. 예상보다는 다녀온 사람도 많았고, 후기도 많이 올라와 있었다. 다만 현지의 생활상이나 교통편 등의 정보를 상세하게 알기는 쉽지 않았다. 개인 블로그를 시작으로 바로 구할 수 있는 여행기, 가이드 북, 전자책을 뒤져서 2주가량 열심히 독파했다. 공부를 이렇게 했으면... 

올해 하반기 즈음해서 쿠바 가이드북이 몇 권이나 나왔다. 그래도 개인적으로 '괜찮아, 여긴 쿠바야'라는 책을 추천하고 싶다. 가이드 북보다는 에세이에 가깝지만, 쿠바라는 곳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가르쳐준달까.

기대할 필요가 없다

10년을 소망해 앙코르와트를 만났을 때를 기억한다. 하지만 가이드를 따라 그 속을 들여다보면서 내 무지를 깨달았던 것 또한 기억한다. 오히려 바다처럼 펼쳐진 톤레삽 호수 위에서 더 행복했음을, 날씨 탓에 먼 호수로 나가보지 못한 걸 아쉬워했음을 또 기억한다.

과연 변하기 전의 쿠바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제야 가게 된 나는 결코 알 수 없다. 과거 모습에 기대어 실망할 일도 없고, 일일이 비교할 무언가를 만들지 않을 것이다.

여건이 허락하는 만큼 보고, 듣고, 느끼다 오게 되겠지만, 그 또한 내게 주어진 만큼이겠지.

흔히들 하는 말. 사람 사는 곳 다 똑같다. 또한 기대할 것도 실망할 것도 없으리라.

뱀발

원래 쓰고 있던 중국 여행기도... 쓰긴 쓸 겁니다. 언젠가는요. 이어 쓰다만 글도 있고요. 쿠바 여행이 워낙 인상 깊었던 것도 이유겠지만, 이 인상이 사라지기 전에 글을 시작하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