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니다드로 가던 길 위에서 - 쿠바 여행기 4

취향의 흔적
- 여행, 2017-12-19, resistan

월요일 아침. 2박 1일간의 아바나를 뒤로하고 트리니다드로 간다.

교통편

예정한 여행 기간이 약 일주일이라, 쿠바의 면적1을 고려하면 다녀볼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았다. 아바나는 출입국 때문에라도 어차피 가야 할 곳이라 논외로 하고. 산티아고 데 쿠바2부터 아바나 방향으로 쭉 따라오면서 구석구석 가보고 싶었으나 국내선 항공편이 아니면 일정상 엄두를 내기 힘든 경로였다. 여행을 계획하면서 육로로 갈 만한 곳 중 까마구에이, 트리니다드, 시엔푸에고스, 비냘레스 정도를 물망에 올리고 교통편을 찾아본 적이 있다.

비아술(Viazul)이라고 부르는 공영 시외버스를 이용하려면 일찌감치 예약해둘 필요가 있다. 동남아처럼 하루 전쯤 여행사나 터미널에서 표를 사는 건 무리다. 버스편이 부족한지 표 구하기가 아주 어렵다. 출발 2주 전쯤에 비아술(Viazul) 예약 사이트에서 코스 몇 개를 찾아봤으나, 일행 숫자만큼 좌석이 없어서 포기했다.

장거리 택시

비아술 터미널에 가면 장거리 택시를 찾을 수 있다고 했다. 트리니다드까지 서너 시간은 걸린다고 해서 아침 일찍부터 짐을 챙겨 나섰다.

아바나 비아술 터미널의 아침 풍경

장거리 이동에 차를 렌트할지 택시를 이용할지 고민을 많이 했으나 택시로 결정했다. 나중에 아바나 시외로 나가면서 본 복잡한 길과 무시무시한 교통 상황에 택시 타고 가기로 한 게 잘한 선택이었다며 우리끼리 뿌듯해했다.

비아술 터미널의 택시 중개인들

둘이 싸워서 대머리 아저씨가 이겼다

터미널 앞에는 사람이 꽤 많았다. 우리가 터미널 건너편으로 내리자 장거리 택시 중개인인 듯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마침 숙소에서 만난 분들과 일정이 맞아 같이 가기로 했고 일행이 열 명쯤 됐다. 배낭을 멘 동양인들이 떼로 도착하니 이게 웬 호구들이냐 했지 싶다.

우리와 흥정하던 사람들끼리 언쟁이 있었다. 우리야 무슨 뜻인지 모르니 이긴 사람 우리 편 기다릴밖에. 어쨌건 트리니다드까지 비용을 나눠 부담하는 것으로 하고 3대의 차를 빌려서 비교적 저렴하게 갈 수 있었다.

도착하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우리가 탄 택시는 불법 영업 차량이었다. 일행이 탄 차 중 한 대가 목적지에 다 도착해서는 경찰 단속에 걸려 차량을 압수 당했다고 한다.

노랗게 도색되어 있거나 캡을 달고 있는 택시는 오히려 드문 편이다. 표식이 없는 것 같지만 합법적으로 영업하는 차량은 앞 유리에 택시 스티커를 붙이고 있다.

아바나 외곽의 아파트

베다도의 현대적인 건물도 보긴 했지만, 아바나 시외로 빠져나가다 보니 처음 보는 형태의 아파트도 있었다. 독특한 채색에 테라스 위로 아치가 살짝 들어가 있다.

1번 고속도로 Autopista Nacional

아바나를 빠져나가서 어느새 탁 트인 도로를 마주한다. 항상 차가 밀리는 한남대교 남단을 떠올려보면… 여기는 차가 없는 셈이다. 드문드문 지나가긴 하지만 추월선이니 뭐니 굳이 필요를 못 느낄 정도.

1번 고속도로 풍경

고속도로 풍경. 탔던 차량의 앞 유리에 금이 가서, 차 안에서 찍었던 사진 일부는 좀... 오토바이가 함께 다니는 모습이 보인다.

마차, 오토바이, 자전거 등이 고속도로와 교차하는 일반도로에서 나오고 있다 고속도로 위에서 히치하이킹하는 사람들의 모습 버스 정류장. 기다리는 사람은 많은데 차가 자주 없는 듯

주변에 보이는 산도 없고, 가끔 만나는 뭉게구름은 지평선에 닿을 듯 낮게 깔려있다. 길을 따라 있는 거라곤 전신주와 중앙 분리대처럼 조성된 관목들뿐.

가끔 이정표는 보이는데, 우리네 고속도로 풍경을 떠올려 보면 1번 고속도로엔 동서를 빠르게 잇겠다는 목적만 남아있는 것 같았다.

오토바이뿐만 아니라 마차가 함께 다니는 고속도로. 가끔 만나는 농업용 차량들, 심지어는 자전거까지도 어느샌가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나를 보게 되는 곳.

고속도로에 버스 정류장이 있는 건 놀랄 일도 아니다. 길가에 나와있는 히치하이커나 일반 도로가 만나는 교차로가 있다는 것 역시.

차가 없으니 기사가 길을 질러 간다며 램프를 역주행해서 올라가는 장면에서 좀 놀라긴 했지만 별일 없었기에 외려 이 모든 걸 납득할 수 있었다. 여긴 쿠바니까.

이 길 위에서 비로소 우리 삶의 과잉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이만큼만 있어도 고속도로인데, 그 역할은 충분히 하고 있는데. 차선도 단속 카메라도 CCTV도, 각종 표지판도 없는 이 길은 과연 빈곤의 증명인걸까.

수십 년 사이에 엄청나게 발전했다는 우리나라의 모습은 정말 더 나아진걸까.

우리가 편리하다 여기는 어떤 것들은 또 다른 불편을 만들어내진 않았나. 불편과 그 해결을 위한 노력이 과연 선순환하고 있는 걸까.

질서와 청결을 위해 우리는 인정과 면역력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

아놔 쫌 노답인데 개똥 같은 질문은 여기까지만.

이름 모를 시골 풍경

휴게소를 한 번 들른 후에는 같이 출발한 일행들과 길이 갈라졌다. 내가 조수석에 앉아선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니 기사가 나름 배려해서 풍경이 좋은 곳으로 가겠다고 했다. 결국 우리가 탄 차는 산타클라라3 근처까지 가서야 남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여기서부터 국도를 타고 산을 넘었는데, 어느새 시골 마을의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수다 떠는 동네 아줌마들은 만국 공통

이런 멋쟁이들 같으니

군인 그림의 현수막이 걸린 어느 마을의 교차로.

도시 출생이라 대학 시절 농활 가서 경운기 뒤에 타본 게 자랑인 수준이다 보니, 마차가 흔한 교통수단인 쿠바의 시골 풍경이 조금은 정겹달까. 아마 부모님 세대라면 소달구지 타던 이야기를 하실지도 모르겠지만.

군인 그림이 있는 현수막이 내걸린 마을 교차로에는 피자 전문점 간판이 보인다. 걷는 사람들이나 생물의 힘(말이든 사람이든)을 이용하는 교통편이 흔한 거리 풍경. 잘 차려입은 멋쟁이와 민소매 차림의 동네 아줌마의 공존이 어색하지 않은 풍경.

음… 어쩌면 이 모든 감상은 낯섦에 대한 동경일지도.

잉헤니오스 계곡의 노예 감시 망루

일부러 운동하겠다며 자전거 타고 한강변으로 나가지 않는 한, 대부분의 시간을 실내에서 보내는 일상을 떠올려보니 스스로가 더 불쌍해지는 이유는 뭘까. 의문의 1패

어느덧 산길을 벗어나 멀리 바다가 보일 것 같은 야트막한 길로 접어드니, 마을 너머로 어디서 많이 본 탑이 서있다. 미리 들여다본 게 있어 얻어걸린 셈. 그래서 잠시 쉬자며 차를 세웠다.

하루 한 번 운행한다는 트리니다드발 증기 기관차로 여행객이 찾는다는 잉헤니오스 계곡(Valley de los Ingenios). 아프리카 사람들을 노예로 끌고 와 사탕수수를 재배했다는 곳인데, 아마 트리니다드로 직행했다면 열차를 탔을지도 모르겠다. 일행과 여정을 함께 하니 둘러보자 말은 못했지만, 가본 셈 치자.

자, 이제 트리니다드가 코앞이다.

뱀발

몇 시간 겪은 이야기를 기록하기 위해 그 몇 배의 시간을 쓰고 있는 난 뭐지. 그냥 바보

  1. 쿠바의 전체 면적은 우리나라 보다 조금 크지만, 동서로는 1400Km가 넘는다. 아무래도 교통수단이 다양하지 않아 이동에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2. 산티아고 데 쿠바(Santiago de cuba): 남동쪽 끝의 공업 도시. 럼 브랜드이기도 하다. 귀국할 때 12년산을 한 병 사 왔는데, 가격은 좀 비싼 편이지만 정말 맛있었다. 술 이야기는 빼놓을 수 없다! 

  3. 산타클라라(Santa Clara): 체 게바라의 도시로 유명한 곳이다. 그의 무덤과 기념관이 있다고 한다.